포석정 – 첨단 과학의 집약체

아래 글은 대학교 4학년 때 싸이월드에 썼던 글인데 얼마 전 한국 역사에 대한 글을 보고 기억이 나서 다시 올립니다. 우리가 우리 문화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글 중에 하나구요.

1999년 가을의 어느 날 쯤으로 기억한다. 우리 역사, 문화재에 대한 책을 하나 읽었었는데, 그 책의 기본 컨셉은 ‘과학도가 본 우리 역사 및 문화재의 우수성’ 이었다.

그 책에는 평소 우리가 그냥 스쳐지나가는 문화재들속에 숨겨진 첨단과학을 보여주었는데, 그 책에서 가장 인상깊어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부분이 포석정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 그 책을 다시 한번 읽고 싶어 기억을 몇번씩 되짚어봤지만 결국 기억나지 않아 포기했는데 그와 같은 내용의 글을 하나 발견해서 너무나 기쁜 마음에 가지고 왔다. 글이 너무 긴 나머지 일단은 내가 간략히 설명하고 뒤에 원래의 글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하겠다.

남북국 시대의 신라에서 포석정은 현재의 유체역학으로도 만들 수 없는 포석정을 만들었다. 포석정은 뭐하는 곳이냐면 중국의 왕희지로부터 비롯된 유상곡수의 하나이다.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간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세 잔의 벌주를 마시는 당시의 놀이였다.

이런 유상곡수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 규모면에서는 일본의 것이 더 화려하고 큰 것이 남아있으며 매년 유상곡수를 재현하는 행사까지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포석정은 무엇이 특출나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위적으로 만든 잔의 흐름에 있다. 중국과 일본에도 유상곡수가 있지만 그것은 잔이 그냥 일방적으로 흐르기만 한다. 그에 비해 신라의 포석정은 전체적인 물길 자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며, 잔이 흐르다 지정된 위치에 잔이 머물거나 혹은 갇혀버린다는 것에 있다. 또한 잔이 흐르다 전복되는 것을 막기위해 특정 부위들에 형태의 변화를 조금씩 주었고, 한번 잔을 놓으면 같은 곳으로는 절대 흘러가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은 포석정안의 모든 물의 흐름 즉, 현대의 유체역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세한 과학적 내용은 뒤에 덧붙인 글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현대의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우리 선인들의 지혜는 한두가지가 아니건만 갈 수록 우리의 역사를 등한시 하거나 비하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그 보다 더 슬픈 현실은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첨단 과학 기법이 적용된 포석정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

1998년 9월 전세계 언론은 북한이 발사한 탄도 미사일이 대포동 1호이냐, 인공위성이냐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은 북한이 1∼2단계는 액체연료, 3단계는 고체연료를 사용한 3단 로켓을 발사하였다는 것이다. 1천 킬로미터 이상 비행하는 로켓에는 액체연료가 사용되는데 액체연료 개발은 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값 또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며 고체연료에 비하여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 게다가 액체연료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발사 직전에 주입해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강력한 힘을 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액체 추진 로켓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나 인공위성, 우주선을 쏘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 북한이 핵탄두 개발에도 성공하였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이러한 액체연료 시스템을 개발한 데서 기인한다. 액체연료 사용 기법은 현재 한국에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인공위성 발사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집고 넘어가야 하는 기술로 국내에서도 액체연료 개발에 근래 성공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포석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왜 갑자기 북한의 탄도 미사일 이야기가 나오는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의 유산 가운데 첨단 미사일이나 우주선과 연관이 있는 것이 있다면 이해가 될까? 그것도 경주에서 국보나 보물도 아닌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포석정이 말이다.

■ 비운의 포석정

포석정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에 있는 석구(石構)로서 사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왕이 보고 따라 추었던 데서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또는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라는 춤이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 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설명] 현재의 포석정.

하지만 이곳은 신라 패망의 현장으로 더 잘 알려진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신라 말기, 고려 태조 왕건은 왕위에 올라 신라를 위협했다. 그리고 왕건이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자 신라에서는 왕건과 친교를 맺어 국가의 운명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게 마련, 신라에서 고려로 투항하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나는 등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자, 신라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경명왕이 사망하고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왕위가 바뀌었어도 신라의 위엄은 서지 않고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여 몸을 부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애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11월 비빈과 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었다. 『삼국사기』에 이 당시의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경애왕 4년(927) 11월, 견훤의 궁대가 왕경(王京, 경주)에 쳐들어왔다. 왕은 왕비 궁녀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 줄도 몰랐다.’

이 기록에 의하면 경애왕은 갑자기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소위 노천 파티를 벌이다가 습격을 당한다. 경애왕은 호위병도 없이 병풍을 손수 가리고 광대들에게 군사를 막게 한 후 이궁으로 달아났지만 곧바로 견훤에게 사로잡혀 왕비와 부하들 앞에서 자결한다. 이후 효종 이찬의 아들 부(傅)가 왕위에 올라 신라 최후의 경순왕이 되지만 그도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안 되어 견훤에게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패망한다.

■ 유상곡수

신라의 최후를 목격한 포석정이 설치된 포석정지는 경주 서쪽 후궁(後宮) 또는 이궁원(離宮苑)으로 면적이 약 1만 제곱미터이며, 약 2.3킬로미터 상류에 최대 저수용량 약 1만8천 세제곱미터 내외의 안골샘못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물이 포어(鮑魚)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水構)로 흐르면 물 위에 띄운 술잔으로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기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이다.

[사진설명] 조선 왕들이 유상곡수를 벌였다는 창덕궁 내의 옥류천.

이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로 부르는데 중국 동진(東晉) 때의 절강성의 작은 도시 소흥(紹興)에서 명필 왕희지(王羲之, 321∼379)로부터 비롯되었다. 왕희지는 난정(蘭亭)에서 가까운 문인 41명을 초대해 시회(詩會)를 즐겼다. 난정이 포석정과 다른 것은 자연석을 이용해 물길을 만들었고 그 규모도 훨씬 크다. 명대에 편찬된 난정수회도(蘭亭修會圖)는 그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연꽃 속에 술잔을 넣어 물 위에 띄워 놓고 유상곡수를 즐기는데 시를 짓지 못한 사람은 벌칙으로 술 석 잔을 마셔야 했다고 적혀있다,

일본에도 여러 개의 유적이 있는데 가고시마의 센간엔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유상곡수터가 남아있고 매년 3월 첫째 일요일에 유상곡수를 재연한다.

포석정도 술잔이 곡수(曲水)를 돌아 각자 앉은자리 앞으로 오면 술을 마시면서 시를 한 수 짓는데 시간이 늦거나 제대로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포석정의 유상곡수에 대해서는 서거정의 시인 십이영가(十二詠歌)에도 나온다.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

생각에 잠겨 옛일을 돌이켜보네

유상곡수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

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이미 옳지 못하네

함부로 음탕하고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쏜가

강개한 심정을 어찌 견딜까

가며가며 오릉의 길 읊조리며 지나노니

금성의 돌무지가 모두 떨어져버렸네’

그런데 포석정의 수로는 측벽을 다양한 크기의 63개 석재를 이용해 조성하였는데 2백 밀리미터 정도 높이에 비하여 측벽 석재의 최대 폭은 150밀리미터 정도이므로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모든 구간에서 내측 함몰은 보이지 않는다. 형태는 구불구불한 포어형으로 동서의 긴 축이 10.3미터, 폭은 약 7미터로 수로의 길이는 약 22미터이다. 수로의 폭은 일정치 않고 약 240밀리미터에서 최대 4백 밀리미터까지 다양하지만, 평균 30센티미터 정도이다. 깊이도 대체로 22센티미터 정도이며 수로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센티미터 정도이다.

그러나 포석정의 경우 규모가 작으므로 물이 그대로 흘러가면 2∼3분 만에 다 빠져나가므로 그 짧은 시간에 4언시나 5언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작(詩作)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7∼10분 정도는 주어야 한다.

포석정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유체역학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술잔이 곡수(曲水)를 돌 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곡수 사적(曲水史蹟)은 물 위에 잔을 띄우면 흘러내려 갈 뿐 좀처럼 맴돌지는 않는다.

[사진설명] 장근식 교수의 포석정 모형 시험.

현재 포석정의 구두(龜頭)는 없어졌으며(원래는 원형 석조 위에 큰 돌거북을 설치하여 그 거북의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는데 조선조 말엽에 어느 부윤(府尹)이 돌거북을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는 소문도 있음), 입구에 있는 5백 년 정도 된 고목의 뿌리에 의해 지반의 융기가 약간 있었지만 수리적인 특성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포석정이 주목을 끄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와류(渦流 : 회돌이) 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회돌이 현상이란 주 흐름에 반하는 회전 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장근식 교수는 포석정의 모형을 만들어 실험과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포석정의 유체역학적 특성에 대해 분석하였는데, 이를 통해 포석정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비정상 난류 유동으로 확실한 회돌이 현상이 일어남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포석정의 유체역학적 기능은 물결이 치는 듯한 독특한 포어 모양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포석정의 물이 흘러가는 경로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시킬 경우 술잔은 결코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술잔은 회돌이 구역에서 돌기도 하고 막혀서 갇힐 수도 있다. 게다가 신라인들은 수로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굴곡이 있는 지점에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측 바닥면의 함몰을 조성하여 술잔의 전복을 방지하였다. 즉 포석정은 다양한 수로를 만들어 그 위에 술잔을 띄웠을 때 다양한 흐름과 위치의 변화를 만들어내도록 주의 깊은 관찰력과 이해력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포석정에서 회돌이 현상을 만들어 술잔이 돌게 하는 것은 실용적인 면에서 매우 특이한 예이다. 공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오히려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 회돌이 현상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우유의 살균법으로 설명하자면, 우유 속에 있는 유해균이 ‘A’온도에서 ‘T’분간 노출되면 전멸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원형 용기 전 표면을 통하여 ‘A α’온도 이상의 열기를 골고루 주었을 때 어느 지점에 있는 우유가 가장 늦게 ‘A’온도에 이르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정 지점에 있는 우유의 온도가 ‘T0’분 만에 ‘A’온도가 된다는 것을 알아내면 ‘T T0’분 가량 열기를 주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정확한 유체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필자의 논문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설명] 그림 1(맨위), 그림 2(위 왼쪽), 그림3(위 오른쪽).

‘그림 1은 열기가 투입된 직후의 유체 흐름으로 정상 상태의 회전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용기 안의 유체는 자연 대류 현상을 일으켜 그림 2와 같은 흐름으로 변형된다. 즉 우측 하단부에 주 흐름과는 반대되는 작은 흐름이 나타나고 그림 3과 같이 몇 개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회전 현상이 생긴 후에도 계속 열을 공급하면 회돌이 현상이 변하여 그림 1과 같은 정상 상태로 바뀌며 에너지 공급은 중단되고 다음 공정으로 넘어간다.’

우주선을 발사하기 직전 액체연료 탱크 안에 있는 액체연료의 온도를 목표 온도까지 순간적으로 올릴 때에도 이와 같은 회돌이 현상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우주선이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때 사용되는 액체연료 탱크의 설계나 우유를 포함한 각종 음료의 살균을 비롯한 실용적인 용도를 위해서는 이 같은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용기를 설계한다. 회돌이 현상은 유체의 주 흐름과의 충돌면에서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을 뜻하므로 유체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방해하는 등 매우 처치 곤란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포석정에 이런 고차원적인 과학기술이 접목되었다고 설명해도 비판적인 사람들은 신라인들이 그런 현상을 우연히 발견하여 포석정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버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석정에서 회돌이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연히 발견되어 시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대학교 유동훈 교수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포석정에서 초반 회돌이가 형성되는 단면은 내측 함몰이 19밀리미터에 이를 정도로 유난히 심하다. 이는 흐름이 굴곡부에서 원심력을 받아 바깥쪽으로 상승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원심력을 감소시켜 회돌이 형성을 뚜렷하게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내측의 수로 벽면이 약간의 역경사로 처리되어 있는데 이것도 단순한 미적 감각 때문이 아니라 수리학적인 이유, 즉 회돌이 형성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후반부 회돌이는 급한 횡굴곡이 있는 곳에서 생기는데 이는 초반 회돌이가 생기는 지점과 다른 요인으로 생기는 현상이다. 초반 회돌이 지점에서는 횡단면이 내측으로 몹시 함몰된 형태로 만들어져 있으나 두번째 회돌이 지점을 포함하여 후반 회돌이 구간 거의 모든 단면은 내측의 함몰 없이 수평한 바닥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재부여된 관성력이 초반 인입 구간에서 형성된 관성력에 비하여 약하기 때문에 내측 함몰 없이 사전 횡굴곡만으로도 회돌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포석정의 경우 물이 흘러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잔을 출발시킬 경우 술잔이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신라인들은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꾸부러진 지점에서는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부의 바닥 면의 굴곡을 세심하게 설계하여 술잔이 전복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사진설명] 유동훈 교수의 모형실험에 의한 3차원 투시도.

■ 유체역학의 모델 포석정

이처럼 회돌이 형성 부분에 따라 구조를 다르게 만든 것은 신라인들이 유체 이동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고도의 유체 이동에 대한 지식을 신라의 선조들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사실 타임머신을 타고 포석정을 만드는 현장을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고대의 과학적인 진실에 대해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과거 유럽에서 유체역학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포석정에서 사용되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어떻게 연구했나를 알아보면 어느 정도 유추해낼 수 있다.

과거에는 유체 이동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가지의 서로 다른 샘플을 만들어 샘플마다 최소한 1천 번 이상의 반복 실험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므로 한 샘플 당 실험하는 데 하루가 소요된다면 최소한 15년이 지나야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과거의 학자들이 이공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데 몇 십 년씩 걸리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필자는 신라인들이 포석정의 회돌이 현상을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 적어도 수천 번 이상의 실험을 거쳤다고 확신한다. 흘러내리는 물의 양, 속도, 수로의 형태와 폭-깊이, 측면의 만곡률, 표면장력, 술잔의 형상-크기-중량-초기의 위치 등을 치밀하게 고려해가며 수많은 반복 실험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필자가 우리의 많은 유산 중에서 규모도 별로 크지 않고 언뜻 보기에 간단하고 단순한 형태의 포석정에 고도의 과학기술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포석정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한 오락시설이라기보다는 신탁이 행해지는 종교적인 장소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 원래 중국에서는 포석정이 건물 안에 설치되는 것이 정설인데, 우리의 포석정도 건물 안에 세워져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경애왕이 견훤에게 살해된 날짜는 음력 11월 양력으로는 12월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추울 때이다. 이런 날 노천의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왕비 등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포석정을 방문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경애왕이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을 방문한 것은 쓰러져 가는 신라의 부흥을 위해 제사 혹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여겨진다.

학자들은 포석정이 갖고 있는 의미를 여러 경로로 추적했다.

우선 포석정에서 불과 1킬로미터 거리의 남산 오릉에는 박혁거세 유리왕 남해왕 등 4명의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의 부인 알령 왕비의 무덤이 있다. 신라 박씨 왕조의 발상지였던 남산은 불교가 수용되면서 많은 불교 유적이 자리 잡은 신라의 대표적인 신성지역이라고 지적했다.

포석정이 단순한 노천 파티장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삼국사기』 문맥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제기되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며 놀았다(遊鮑石亭宴娛)’에서 ‘유(遊)’를 ‘놀았다’가 아니라 ‘갔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고려 시대에 작성되었음도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저자들이 신라 멸망의 당위성과 새 왕조인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부각시킨 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포석정의 주변 상황과 포석정의 구조로 보아 신성 지역에서 왕이 연회를 베풀고 놀이를 즐겼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고 계속 학자들이 주장했다. 게다가 신라시대에 왕들이 놀이를 즐기거나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 장소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안압지(雁鴨池)와 임해전(臨海殿)이다. 이런 장소를 두고 규모도 크지 않은 포석정에서 노천 파티를 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다.

KBS역사스페셜팀의 정종목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경애왕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달라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즉 팔관회(八關會)를 열기 위해서 포석정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신라는 진흥왕 때 전몰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했고 선덕여왕 때도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팔관회를 열었다.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도 몽고가 침입했을 때 강화에서 팔관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보아 팔관회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치러진 의식이라 볼 수 있다. 팔관회가 열렸던 시절은 모두 음력 11월이었다.

정종목은 견훤의 군대가 진격해오고 있던 때,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 놓은 경애왕은 포석정을 찾아 제사를 지내다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이종욱 교수도 포석정을 시조묘와 연관시켜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 같은 인물을 모신 사당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박씨로 왕위에 오른 경애왕도 조상들을 찾아가 나라를 수호하고 박씨 왕의 지위를 유지시켜 달라고 제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포석정에서 건물 흔적도 발견되었고 1999년에는 ‘포석(鮑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었다. 기와조각이 나온 곳은 포석정 모형전시관을 건립하려는 포석정 남족의 4,300제곱미터의 부지로 시굴 조사과정에서 가로 12센티미터, 가로 16센티미터의 기와에 나뭇가지 무늬와 함께 포석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 6점이 출토된 것이다. 기와에 새겨진 포자는 포석정을 뜻하는 포(鮑)자가 아니라 포(砲)자 인데 학자들은 포(鮑)자를 약자화해 쓴 것으로 추정한다.

여하튼 인근 부지를 상대로 정확한 발굴을 하면 흔적이 발견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럴 경우 포석정의 원형이 훼손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우리의 유산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한편으로는 포석정이 가장 효율적인 관개수로 축소 모형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그것은 포석정의 수로를 원형에서 조금 바꾸면 그에 따라 물의 흐름 변경에 따른 에너지 소모가 많아진다는 연구 결과에 근거한다.

여하튼 현대 과학으로 풀어볼 때 실무 공학적인 면에서 가능한 한 발생되지 않도록 하는 회돌이 현상을 오히려 역으로 자유롭게 나타나도록 설계하였다는 점은 포석정에 대해 아무리 과찬하여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조들의 과학적인 업적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있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포석정은 경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덕궁의 후원의 깊숙한 옥류천 개울가에도 있었다. 소요암 아래 널찍한 바위를 물이 휘돌아 나가도록 해놓고 경주의 포석정과 같이 임금이 술잔을 띄워 보내면 술잔이 닿는데 앉아있던 신하가 시를 지어 읊어야하는 시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다소 작은 감이 있다.

소요암에 새겨진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는 인조의 친필이며 다음 시(詩)는 숙종의 작품이다.

‘폭포는 삼 백 척인데

멀리 구천에서 내리고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어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출처 : 국정브리핑, 2005. 3. 3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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